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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히트의 심장 영구 결번 드웨인 웨이드. 치열했던 2003년 드래프트에서 5번 픽으로 마이애미 히트의 지명을 받아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05~06 시즌에는 동부의 강력한 상대들을 하나씩 잠재우면서 동부의 강자로 파이널에 진출하였다. 파이널에서는 댈러스 메버릭스를 만나 마치 마이클 조던이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할 만한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우승과 함께 파이널 MVP를 차지하였다.

 

 

 

 

1.  웨이드의 유년기

 

 

  웨이드는 1982년 1월 17일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홀 어머니 밑에서 누나와 함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8살 이후에는 그의 누나가 웨이드를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면서 웨이드는 그의 이복형제들과 새로운 가정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웨이드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농구 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시카고 불스를 가장 좋아했고, 조던이 본인의 롤모델'이었다고 밝힌 것처럼 농구만 생각하던 웨이드는 조던처럼 되기 위해 뒷마당에 있던 허름한 농구 코트에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농구와 풋볼을 동시에 하면서 운동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주었다. 1학년을 마치면서부터는 키가 10cm나 자라면서 농구에서 더 많은 출전시간이 주어집니다. 출전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능력치도 많이 올랐고, 2학년 때부터 평균 득점이 20점을 넘었고, 3학년이 되면서 평균 득점 27점 11 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팀을 24승 5패의 성적으로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학업적인 부분이 부족해서, 좋은 성적에 비해 세 군데의 대학에게만 러브콜을 받았고, 그는 그중 마케트 대학교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대학교 입학 후에도 웨이드는 학업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신입생 때 NCAA의 학업 기준에 달성하지 못하면서 농구부 활동을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학업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서 학업 기준을 만족시켰고, 조금 늦은 2학년 때부터 대학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데뷔 시즌부터 뛰어난 성적으로 팀의 성적을 올리는데 일조했고, 그다음 시즌부터는 더 좋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팀 내에서 압도적인 1 옵션으로 성장합니다. 그 이후로 웨이드는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면서, 시즌을 마치고 NBA 드래프트 참가를 선언했습니다.

2.  플래시맨의 전성기

 


  NBA 역사상 최고의 드래프트로 불리는 2003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5번 픽으로 마이애미 히트의 지명을 받아서 제대로 된 전설의 커리어가 시작되었습니다.  루키 시절의 웨이드는 슈팅가드가 아닌 포인트가드 포지션을 맡았습니다. 첫 경기부터 선발로 출전해 18 득점 4 어시스트 4 리바운드로 비교적 준수한 데뷔전을 치러냈습니다.

 

  반면에 시즌 초반에 마이애미 히트의 팀 성적은 저조했는데, 개막 후 5연패로 출발해서 오랫동안 5할 승률 밑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웨이드는 리그 경기에 적응하면서부터 평균 16.2 득점 야투율 46.5%로 좋은 활약을 보여줬지만, 웨이드 보다 앞서 뽑혔던 르브론 제임스와 카멜로 앤서니에게 밀리면서 상대적으로 주목을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팀이 시즌 중반부터 점점 승수를 쌓기 시작하면서 반전에 성공했고, 동부 4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됩니다. 플레이오프에서 처음 만나게 된 상대는 뉴올리언스 호네츠였고, 웨이드는 21  득점으로 최다 득점을 뽑아내면서, 마지막 위닝샷까지 성공하면서 클러치 본능을 보여줬습니다.

 

1라운드는 접전 끝에 뉴올리언스를 꺾고 2라운드에 올라갔습니다. 2라운드에서는 동부 1위 팀인 인디애나와 만났고, 웨이드는 시리즈 평균 21 득점을 내면서, 루키 답지 않은 좋은 활약으로 팀을 이끌었지만, 2승 4패로 탈락을 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다음 시즌 마이애미 히트는 샤킬 오닐을 영입하면서, 웨이드와 강력한 원투펀치를 만들어 우승후보를 꿈꾸는 팀으로 급부상했습니다. 1년 만에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은 웨이드는 77경기를 모두 선발로 나오면서 평균 득점이 24.1 득점으로 한 껏 올랐고 레이커스에서 코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오닐은 웨이드와 더 좋은 관계로 지내고 싶다는 말과 함께 둘은 더 좋은 시너지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전의 해보다 17승을 더 이뤄내면서 동부 1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런 좋은 성적에 웨이드는 2년 차에 올스타로 뽑혔고, 올 NBA 세컨드 팀과 디펜시브 세컨드 팀에도 뽑히면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3년 차 시즌에는 샤킬 오닐이 발목 부상으로 코트를 잠시 떠나 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리그 정상급 선수로 올라서있는 웨이드는 혼자서도 팀을 잘 이끌었고, 작년보다 거의 모든 스텟을 끌어올리면서 올스타전 선발로 출전했습니다.

 

거기에 3년 연속으로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는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도 했는데 시카고, 뉴저지, 디트로이트를 차례대로 격파하고 생애 첫 NBA 파이널 무대에 진출하게 됩니다. 상대는 독일병정 덕 노비츠키가 이끄는 델러스 매버릭스였고, 마이애미는 1,2차전을 큰 격차로 패배하면서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하지만, 홈으로 돌아온 마이애미에게 3차전부터 반전의 드라마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웨이드가 주특기인 돌파보다 상대적으로 덜 사용하던 미들 점퍼를 꽂아 넣으면서, 42 득점을 뽑아내는 화끈한 공격력을 보여줬습니다. 엄청난 체공 능력으로 13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등 대단한 활약을 펼치면서 팀은 2점 차로 시리즈 첫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이 경기를 시작으로 웨이드의 공격력은 더 많은 득점으로 이어지면서 4,5차전에서 40 득점 이상을 퍼부은 반면, 댈러스의 노비츠키는 4차전에서 슛의 난조로 연장전까지 가면서 5차전에서는 웨이드에게 25개의 자유투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중 21점을 웨이드가 성공시키면서 마이애미가 3-2로 시리즈를 역전하였습니다.

 

그리고 6차전에서도 웨이드는 16개의 자유투 득점과 8개의 미들슛을 성공시키면서 36 득점을 이뤄냈고, 95-92로 승리를 견인하면서 마이애미에는 창단 첫 우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4경기에서 평균 39.3 득점을 성공한 웨이드는 NBA 데뷔 3년 만에 파이널 MVP까지 받게 되면서 최고의 시즌 마무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24살에 우승을 차지한 슈퍼스타를 보유한 마이애미의 미래는 밝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샤킬 오닐과 웨이드가 부상을 당하면서 침체기에 빠졌고, 웨이드는 2 시즌 내내 각각 51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체력 저하의 문제로 하락세를 보이던 오닐은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되었고, 08-09 시즌에 몸 상태를 다시 회복한 웨이드는 79경기에 출장해서 평균 30.2점을 달성하며 득점왕까지 차지하는 등 재차 마이애미는 반등을 노렸습니다.

 

  하지만, 오닐의 빈자리를 대신해 줄 만한 팀의 동료가 없었고, 결국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애틀랜타에게 패배하면서 조기 탈락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승 이후 4년간 우승대권팀이라고 보기 힘든 어려운 상황에 처한 마이애미는 10-11 시즌 시작을 앞두고 농구팬들이 놀라게 할 만한 선수 영입을 했습니다.

 

토론토에서 크리스 보쉬, 클리브랜드에서 르브론 제임스를 동시에 영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각자의 팀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슈퍼스타들이 한 팀에 합류하면서 최고의 BIG3가 탄생했고, 르브론은 8년 연속 우승을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포부를 밝혔습니다.

 

  많은 기대 속에 시작된 마이애미의 10-11 시즌 초반에는 저조한 승률을 기록하면서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이었으나, 점차 선수들 간의 호흡이 맞아가면서 12연승을 질주하는 기염을 토해냈고, 최종 58승을 이뤄내며 동부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습니다.

 

든든한 동료들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웨이드는 필라델피아, 보스턴, 시카고를 연달아 4-1로 격파하면서 파이널에 진출하였습니다. 파이널에서 만난 상대는 5년 전 파이널에서 만나 우승을 안겨주었던 댈러스 매버릭스였습니다.

 

4차전까지 2-2로 치열하게 맞붙었고, 그중 2차전부터 4차전까지는 3점 이내로 승부가 결정된 접전이었습니다. 아쉽게도 5차전을 9점 차로 댈러스에게 내어주면서 벼랑 끝에 몰렸고, 꼭 승리를 따내야만 했던 6차전에서도 95-105로 패하면서 우승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2003 드래프트 1 픽, 4 픽, 5 픽이 뭉쳐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우승에 실패한 마이애미는 단축 시즌으로 진행된 11-12 시즌을 작년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고, MVP모드에 돌입한 르브론 제임스에 힘입어, 다시 한번 동부 2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컨퍼런스 파이널까지는 어려움 없이 올라갔으나,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라존 론도의 보스턴 셀틱스와 7차전 까지 가는 숨 막히는 접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 옵션 자리를 넘겨받은 제임스의 엄청난 득점과 웨이드의 도움에 힘입어 7차전을 승리로 이끌고 파이널에 올랐습니다.

 

상대는 케빈 듀란트, 제임스 하든, 러셀 웨스트브룩의 OKC였고, 마이애미는 1차전을 94-105로 패하면서, 다소 불안한 출발을 했지만, 다음 경기부터는 큰 무대 경험이 없는 루키들을 상대로 4경기를 연속으로 잡아내면서 웨이드는 팀의 두 번째이자, 자신의 커리어 두 번째 우승을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번에는 월등히 뛰어난 1 옵션으로 활약한 제임스 르브론이 파이널 MVP를 차지했지만, 웨이드 또한 22.6 득점, 5.2 어시스트 6.0 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줬던 한 해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12-13 시즌에 웨이드는 당시 커리어하이 야투율을 갱신하면서, 작년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줬고, 시즌 후반에는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플레이오프 무대에서는 잠깐 주춤했지만, 7차전까지 공방을 치렀던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21 득점을 기록하는 등 필요한 순간마다 제 몫을 해주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샌안토니오와 대결한 2013 파이널은 영원히 기록에 남을 만한 명승부를 연출해 냈습니다. 5차전까지 마이애미는 2-3으로 뒤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겨야 하는 6차전에서도 끝나기 직전까지 3점 차로 뒤쳐지며 준우승 위기에 몰렸으나, 종료 5.2초를 남기고 레이 알렌의 환상의 동점 3점 슛이 작렬하면서 승부는 연장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연장전 끝에 6차전을 승리로 이끌어내면서 우승에 문턱에 한 발 다가갔고, 7차전까지 승리를 잡아내면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시즌에도 3년 연속 우승을 하기 위해 웨이드는 관리를 받으면서 정규 리그를 30경기정도 결장하는 등 플레이오프에 모든 초점을 맞췄고, 마이애미는 2014년에도 한 번 더 파이널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웨이드는 파이널에서 예상치 못한 부상으로 인해 경기력이 저하되면서 시리즈 평균 43%의 저조한 야투율로 계속 이어져 기대 이하의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고, 결국 다시 만난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상대로 5경기 만에 패배하면서 시즌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르브론은 다시 클리브랜드로 복귀했고, 마이애미의 BIG3 조합은 해제됩니다. 르브론이 클리브랜드로 돌아간 후 웨이드는 보쉬와 함께 두 시즌을 마이애미에서 함께 했지만, 웨이드는 더 이상 전성기와 같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플레이오프 탈락, 2라운드 탈락등 르브론이 떠난 이후로 마이애미는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진 팀으로 전락했습니다.

 

  이후 2016년 웨이드는 마이애미와 재계약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3번의 우승을 견인했음에도 노쇠화로 인해 적은 연봉을 제시한 구단에 실망하여 결국 다른 팀과 협상하겠다는 선을 하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히트는 웨이드에게 2년간 4천만 달러 계약을 제시했으나, 이미 마음이 상한 웨이드는 자신의 고향인 시카고 불스와 계약을 맺게 됩니다. 비록,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20 득점대에 평균 득점과 괜찮은 수비력으로 팀에 공헌하면서 동부 8위로 팀을 이끌어냈습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빠르게 떨어졌고, 시카고의 리빌등으로 인해서 웨이드는 바이아웃 협상을 통해 구단과 계약을 해지하게 되면서 다시 절친 르브론이 있는 클리브랜드로 이적하게 됩니다.

 

  36살 노장이 된 웨이드는 3경기 만에 벤치 역할을 자처하면서 벤치 에이스로 제법 괜찮을 활약을 해줬으나 어빙의 공백으로 전력이 많이 기울고 있던 팀 사정상 시즌 중반 트레이드 기간 중에 다시 히트로 트레이드되면서 생각보다 좀 빠르게 마이애미로 복귀를 했습니다. 마이애미와 재회를 하게 된 웨이드는 자신의 전성기를 보냈던 팀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3. 플레이 스타일

 

  NBA 역사상 몇 안 되는 공격형 슈팅가드 이자 공수겸장, 볼핸들링과 시야, 패스 전체적으로 뛰어나서 데뷔 때는 포인트 가드를 보기도 했다. 플래시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리그 최고 수준의 퍼스트 스텝을 가지고 있었으며, 방향 전환과 돌파시 핸들링이 뛰어나서 수비 사이를 파고들어서 돌파해 내고 강인한 신체를 이용하여 컨택을 이겨내고, 득점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3점 안쪽 지역 어디서나 마무리할 수 있는 기술이 있으며, 기복이 조금 있긴 하지만 미드레인지 점퍼도 준수한 편이다. 

 

  수비에서도 공격 못지않게 타고난 순발력을 이용하여 , 적극적으로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헬핑 디펜스를 보여주었다. 지역방어가 도입된 후 토니 앨런과 함께 같은 포지션 최고의 퍼리미터 수비수로 인정됐다. 스피드와 긴 팔을 이용한 스틸이나 블록 슛에도 능숙하여 마이클 조던, 빈스 카터 등과 함께 가드 포지션 최고의 블라 커 중 하나로 기억된다. 페인트 존 득점이 많은 편이고, 야투율이 높은 데다가 뛰어난 블락슛 능력을 갖추고 있어 동부 센터라는 별칭도 있다. 08-09 시즌에는 40승대 팀을 이끌고 수비왕 3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빅 3 마이애미가 상대적으로 약한 프런트 코트를 지니고도 골밑이 강한 팀들과 맞서 이기며 4년 연속 파이널에 올라갈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바로 웨이드와 르브론이라는 최고의 퍼리미터 디펜더들을 앞세워 무한 스위칭 헷지 디펜스였다. 웨이드와 르브론의 전방 압박 수비에 이은 속공 플레이가 당시 마이애미 히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단점은 3점 슛이 많이 약하다는 점. 개인 통산 3점 슛 성공률이 30%가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3점 슛을 많이 던지지는 않는 편이다. 그리고 3점 슛보다도 더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부상이다. 돌파형 선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수들과 많이 부딪히고, 폭발적인 움직임을 쉴 새 없이 보여주다 보니, 과거 앨런 아이버슨처럼 자잘한 부상을 달고 있는 데다가 원맨팀 시절에 쌓인 대미지도 상당하다. 

 

  다만, 부상 문제는 선수 본인의 관리에만 책임을 묻기에는 어려운 부분이다. 한 시즌 82경기를 소화하는 NBA 무대에서 에이스가 견뎌야 할 혹사 문제도 있고, 경기 중 상대 수비수와의 충돌, 불안정한 착지 등 운과 주변 환경의 영향들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쉬와 제임스의 이적 이후 혹사의 정도가 많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쌓였던 대미지와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인해 결장경기가 많아졌다. 그 예로 정규시즌을 반 가까이 결장하고 가졌던, 13-14 시즌 플레이오프에서는 이름값에 맞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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